대립의 결과인 동시에 제국주의정책의

BC 130-120년경부터 약 1세기 동안 로마와 이탈리아는 내전에 시달린다. 이 혼돈의 시 기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카이우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조치로뷰ㅜ터 시작된다. 그 들은 먼저 엘리트 로마인의 거만함을 누그러뜨리려고 했으며, 제국주의 정책의 성과를 공 평하게 재분배하고자 했다. 가난한 로마의 시민들에게 땅을 할당해준 것 등이 그런 예이 다.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암살당한다. BC 91년-88년 사이에, 로마의 월권행위에 격분한 이탈리아 동맹의 일부가 정복전쟁의 성과를 분배받는 데 한몫 할 욕심으로 로마에 마지막으로 저항한다(동맹시전쟁). 짧았지만 매우 격렬했던 이 전쟁은 내전의 형태를 띠었으며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이 났다. 하지만 로마에서도 신중론이 고개를 들었다. 100여 년간이나 이어져온 그들의 동맹을 더욱 견고 히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. 로마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의 권리를 부여한다. 세 번에 걸쳐 일어난 내전은 로마 엘리트들간의 영향으로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 심각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. 계속되는 전쟁과 승리한 군대들이 가져온 귀중한 전리품들로 인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 상이 나타났다. 즉 로마 병사들은 서서히 직업 군인이 되어갔다.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. 또 그들의 대장, 즉 최고 집정관들이 정복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획득 했다. 결국 직업적인 군대에 의존하여 개인이 군대를 소유하기 시작하는데, 이때가 BC 1 세기초이다. 그라쿠스 형제사건과 동맹시 전쟁이 끝나갈 무렵, 또 다른 위기가 로마에 찾 아온다. 이 위기는 BC 27년 로마에 새로운 정치체계가 들어서면서 끝난다. 마리우스와 실라의 대립(BC 87-82),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충돌(BC 50-48), 이러한 내전들은 당시 명망 높은 장군들 사이에 독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. 동시에 이것은 더 이상파당간의 적대관계를 저지할 수도, 필요한 개혁을 수행할 수도 없는 구체제에 대한 파산선고이기도 했다. 끊임없이 늘어나는 시민의 숫자와 제국 의 확장에 대처해서 로마 공화정의 정비가 필요했던 것이다. 로마의 실력자들은 저마다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.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(BC 44) 카이사르의 반대파와 추종자들 간 에 새로운 대립이 일어났다(BC 44-42). 여기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추종자들 사이에도 분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. 다시 내전이 일어났다. 안토니우스와 그의 동맹자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의 후게자인 옥타비아누 스가 맞섰다(BC39-31). 이 대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둔다. BC 27년 옥타비아 누스는 제1인자로서 원로원 의장의 권위를 확고히 하면서 아우구스트스라는 칭호를 부여받 고 로마 제국을 설립한다. 새로운 정체체제인 제국(empire)의 명칭은 원로원이 부여한 황제(emperor)라는 이름에 서 따온 것이다. (라틴어 imperator는 개선 장군을 의미한다.) 로마제국은 도시국가 로마 의 계속된 정복활동과 확장이 불러일으킨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통치와 행정기구들 을 효율적으로 조정해 나간다. 이제 로마는 1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화와 통일을 유지한다. 그 동안 내전에 동원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돌려, 끝까지 로마에 저항하는 민족들을 정벌 하자 평화가 찾아왔다. 또 전쟁과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후부터 이탈리아인들과 로 마의 속주 주민들 모두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의식해 통일이 유지될 수 있었다. 적어도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지배를 문제삼지 않았다. 이 평화의 시기(팍스 로마나)에 프린키파 투스(원수정)라 불리는 체제가 탄생했다. 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한 로마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체를 이루며, 그 속에서 인적, 경제적, 문화적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진행시킨다. 이 통 일된 체제 속에서 러마 문명은 절정기를 맞이했다.